아이가 끙끙대며 장난감 블럭을 쌓을 때 도와준 적 있으신가요? 아이가 스스로 블럭을 쌓다가 반듯하게 쌓지못해 무너져서 짜증을 낼 때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되" 하면서 정답을 알려줍니다. 빨리 아이가 원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게 짜증을 안나게 하는데 도움이된다고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그 순간이 사실은 아이의 중요한 발달 기회를 빼앗고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가 발견한 이론이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을 어느 목욕 후 저녁, 남편의 말 한마리로 깨달았습니다.
아이 목욕을 마치고 로션을 발라준 뒤, 이제 바지를 입혀주려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이 스스로 입게 해볼까?"
그때까지 저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의 바지를 직접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생각 없이 반복하는 루틴 중 하나였습니다. 아이는 처음에 " 못해 엄마가 해줘"라며 떼를 썼습니다. 그래서 발목까지만 발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허리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엉덩이 부분이 걸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해냈다는 작은 성취가 눈에 보였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왔던 제 루틴이, 사실은 아이에게서 스스로 힐 기회를 매일 조용히 빼앗고 있었다는 것을요.
처음에는 솔직히 답답했습니다. 제가 3초면 끝낼 일을 아이 혼자 하게 두면 1분도 넘게 걸리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복하다 보면 아이가 바지도, 티셔츠도, 양말도 스스로 입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오히려 내가 더 편해지는 거 아닌가?'
실제로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이제는 발목에 발을 넣는 것도 아이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게 더 뿌듯했습니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ZPD)'이란 무엇인가
이 개념은 소련의 발달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가 제시한 개념으로 바로 ZPD(Zone of Proximal Development), 우리말로 '근접발달영역'입니다.
아이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해낼 수 있는 발달 가능성의 영역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아이의 현재 능력과 잠재력 능력 사이의 '간격'입니다. 비고츠키는 이 간격 안에서 진정한 학습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아이가 바지를 혼자 입는건 그 시점에는 아직 어려었습니다. 하지만 발목까지만 넣어주면 나머지는 스스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발목에서 허리까지'가 바로 우리 아이의 ZPD였던 것입니다.
ZPD의 4가지 발달 구간
1구간 : 이미 혼자 할 수 있는 것(현재 수준)
2구간 : 도움 받으면 할 수 있는 것(성장이 일어난느 곳)
3구간 : 아직은 너무 어려운 것
4구간 : 한참 후에나 가능한 것
중요한 것은, 정답을 바로 알려주면 아이가 '2구간'을 그냥 건너뛰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과만 얻고, 사고 과정은 통째로 생략됩니다.
왜 "정답"을 바로 주는 것이 독이 될까
아이가 ZPD 안에서 씨름하는 그 순간이 뇌가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시간입니다. 끙끙대는 것 자체가 학습입니다. 그 순간에 정답을 건네주면, 아이는 그 씨름의 기회 자체를 잃습니다. 이를 발달심리학에서는 '인지적 도전(Cognitive Challenge)의 박탈'이라 부릅니다.
정답을 알려줄때
1. 사고 과정 없이 결과만 습득
2. 비슷한 상황에서 또 막힘
3. 부모 없이는 못 한다는 의존성 형성
4. 실패를 두려워하는 심리 강화
5. 장기적으로 부모가 더 힘들어짐
ZPD 안에서 지원할 때
1. 사고 회로를 스스로 구축
2. 응용력과 자립심이 함께 성장
3. 자기효능감(Self-efficacy) 향상
4. 실패를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힘
5. 장기적으로 부모도 더 편해짐
스케폴딩(Scaffolding)
비고츠키의 이론을 이어받아 발달심리학자 제롬 브루너가 발전시킨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스케폴딩'(Scaffolding)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세우는 발판 같은 것은데요, 건물이 완성되면 발판은 철거합니다.
아이의 학습도 똑같습니다. '발목까지 넣어주는 것'이 발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아이가 스스로 했습니다. 아이가 혼자 할 수 있게 되면, 그 발판도 하나씩 걷어냅니다.
"좋은 교사란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설계해주는 사람이다." - 제롬 부르너, 발달심리학자
스케폴딩 개념은 아이의 성장뿐 아니라 부모 자신을 위해서도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처음엔 기다리는 게 답답하고 귀찮게 느껴지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해낸다는 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올라가고, 그 반복이 결국 부모도 더 편하게 만드는 선순환을 만들어냅니다.
5가지 ZPD 실천법
1.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파악하기 : 아이가 어디서 막혔는지 파악하는 것이 스케폴딩의 출발점입니다. 아이의 현재 ZPD 위치를 먼저 확인하기
2. 최소한의 발판만 제공하기 : '발목까지 넣어주기'처럼, 아이가 시작할 수 있는 딱 한 단계만 도와주세요. 그 이상은 아이의 몫입니다.
3. 20초 침묵 원칙 지키기 : 아이가 막히면 최소 30초는 기다리세요. 불편하더라도 그 침묵이 아이의 사고를 촉진합니다.
4. 결과보다 과정 칭찬하기 : "잘했어" 보다 "혼자 해봤구나, 대단한걸?"이 자기 효능감을 훨씬 강하게 키웁니다.
5. 시간에 쫒길때는 의도를 말해주기 : 매번 기다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땐 "오늘은 엄마가 도와줄게, 다음엔 너가 해봐"라고 말해주세요. 의도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다릅니다.
오해
"그럼 아무것도 알려주면 안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고츠키의 ZPD는 방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ZPD 바깥, 즉 아이의 현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혼자 하게 두면 성장이 아니라 좌절만 남습니다.
핵심은 지금 아이가 어느 구간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너무 쉬운 것은 성장을 만들지 못하고, 너무 어려운 것은 좌절만 남깁니다. 딱 한 발짝 어려운 곳, 그곳에서 최소한의 지지를 줄 때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ZPD이고 스캐폴딩입니다.
마무리
오늘 저녁, 10초만 참아보세요
우리는 종종 '좋은 부모'를 '모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주는 부모'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진짜 좋은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곁에서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혹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계신 건 아닌가요? 만약 그렇다면 오늘부터 조금씩 시도해보시길 권합니다.